가을이었고, 밤이었다.
 
 꽃이 피기에는 늦은 계절이었고 시간이었지만 먼 옛날 영원을 사는 용을 한 인간에게 붙잡아 두기 위해 세워졌다는 궁은 그들의 후손을 위해 다시 한 번 시간을 붙잡아 주었다. 마법이 걸린 궁전 속에서 꽃들은 어둠을 잊었다. 땅을 보고 뒤집혀 피어난 꽃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꽃잎의 색만큼 다양한 향기가 뒤섞였다. 그들 중 몇몇은 동이 트고 나서야 꽃잎을 접을 터였다. 길게 갈라진 꼬리를 단 새들이 꽃 사이를 짓쳐 날았다. 기운이 빠진 꽃들을 마차까지 부축해 가기 위해 들어온 그들은 낮게 날며 끊임없이 꽃들에게 말을 걸었다.
 
 가장 높은 자리가 비워져 있음에도 사람들은 편안하고 쾌활한 기색만을 얼굴에 담았다. 공석이 당연해진 자리를 두고 부채로 얼굴을 가릴 사람은 없었다. 단 과자와 술을 은쟁반에 받쳐 든 궁인들이 바쁘게 지나다녔다. 악단의 연주가 부드럽게 이어졌고 누구도 등 뒤에서 터지는 웃음소리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둠을 잊은 사람들은 시간조차 잊었다. 시계를 두지 않은 무도회장에선 용을 조각한 얼음상의 표면으로부터 녹아 떨어진 물방울이 연회가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만을 간신히 알렸다. 창문을 열고 달의 높이를 헤아리면 그보다는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겠으나 커튼을 걷고 싶지 않았다. 야회에서 커튼을 친 테라스가 의미하는 바는 열 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알았다. 나는, 자리를 지켜야 했다.
 
 뻐근한 목을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황금 사슬에 매달려 빛을 흩뿌리는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환상이 일었다. 기억이 불러온 착각은 크리스탈이 반사시킨 빛을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로 만들었다. 솨아아…… 바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프레이야.
 
 눈을 감았다. 그때의 당신이 손으로 내 눈을 가리고 있었으므로.
 
 ―누구게?
 
 늘 생각이 많아 행동은 느린 사람이었다. 기습적인 애정표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만큼 드물게 보이는 소년 같은 장난이 어디서 듣고 왔는지 궁금해질 만큼 어설퍼서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르메인.
 
 당신이 나를 프레이야라고 불렀으니 나에게 당신은 르메인이었다. 용의 후손도 한 나라의 주인도 만민의 지상인 '루'도 아닌 그냥 르메인. 당신이 나를 그 반쪽짜리 엘프나 그 왕의 후궁 혹은 그 여자라고 부르지 않고 프레이야라고 불렀으니까.
 
 그래서 나의 르메인, 당신도 내게는 꽃 같았다. 당신을 보면 생각나는 꽃이 있었다. 어린 시절과 함께 두고 온 땅에서 피던 푸른 꽃. 한 송이로는 크지도 억세지도 않지만 온 들판을 다 뒤덮으며 넓게 퍼져, 바다로 착각한 물새가 날아들었다가 길을 잃게 만드는. 상냥한 고향이 아니었는데도 그 풍경은 자주 그리웠다. 당신을 알고 나서부터 그 풍경을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은 카이리스에 같은 꽃은 없지만 다른 푸른색은 줄 수 있다며 내게 지평선을 만들 만큼 넓은 밀밭을 가진 땅을 주었더랬지.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강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좋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겠다며 머리를 기대면 아무 말 않고 그대로 기다려 주는 사람이었다. 그 위안만으로도 나는 평생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괜찮았다. 두 아내에게 모두 '공평한' 남편인 당신이 바로 옆에 의자가 마련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수도, 단상에서 내려와 아래에 선 사람들에게 다른 아내를 소개할 수도 없어 매 연회마다 정사를 핑계로 자리를 비워도.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 어느 쪽일지는 분명해도. 슬프지 않았다.
 
 벽의 꽃으로 피어나는 일에는 자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내가 무해한 존재임을 알리는 법은 질리도록 잘 알았다. 자기를 숨기는 일이 타인을 속이는 기망이라 생각지도 않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저 살아 숨쉼만으로 누군가의 적의를 사 온 사람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 순진한 사람이겠지…… 그러니 꾸며냈다 하더라도 한평생 그리 해 왔다면 그건 나였다.
 
 짧은 상념은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깨졌다. 활달한 원무에 지친 어린 꽃 하나가 부어 버린 발목으로 회장을 빠져나가다 그만 옆사람과 부딪혀 그의 귀걸이 한 짝을 떨어뜨리며 낸 소리였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직접 주우면 예절에 어긋났고 시종을 시키면 상대에게 모욕이었다. 몇몇 심술궂은 사람의 낯빛에 장난기가 스쳤다. 그보다 사려 깊은 사람들의 눈은 높은 자리로 향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통솔할 권한을 가진 주인이 그곳에 있었다.
 
 실리케 브리센이.
 
 왕이 없는 지금에, 아니, 기실 왕이 있을 때조차 이 자리의 진짜 주인은 그녀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비단술이 달린 부채를 느릿하게 흔들며 모든 꽃들의 주인이 소란의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언제도 누구도 올려다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자격을 갖춘 사람의 오만은 방자함이 아니라 긍지였다. 그녀는 마땅히 자신만만했고 순전히 아름다웠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인 동시에 잔인하도록 변덕스러운 달이었다.
 
 반투명 레이스 소매 속에서 가뜬가뜬 움직이던 흰 손이 부채를 입술 가까이 가져갔다. 그 순간 악단의 지휘자에게서 지휘봉을 빼앗고 싶었다. 심장이 멈추었으면 했다. 그녀의 말은 지극히 짧은 단어 하나라 해도 다른 소리에 묻혀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모든 것은 언제나 오롯이 완전한 형태로 존재해야만 했다.
 
 아, 그러나 주홍빛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섬세하고 긴 손은 부채가 입술에 닿기 전에 방향을 바꾸었고 연녹색 눈동자는 아무런 표정 없이 투명했다. 탁, 접힌 부채가 팔걸이에 놓이는 소리가 아팠다. 귀걸이는 어느 젊은 귀족의 손을 거쳐 주인에게 돌아갔다. 애초에 끊긴 적 없었던 연주는 순조롭게 곡의 절정으로 흘러갔다. 흥미거리를 기대하던 사람들도 다시 앞에 선 사람을 마주 보았다. 곤경에 처한 정혼자를 위해 기꺼이 다른 여인 앞에서 허리를 굽힌 다정한 남자의 이야기가 웃음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들렸다. 그늘 속에 서서 여전히 상석에 시선을 고정한 사람은 나 하나였다.
 
 잠시 눈을 뗀 순간은 음료를 권하는 시종으로부터 얼음을 띄운 탄산수를 받던 때뿐이었다. 그러니 나는 시종에게 감사해야 했다. 내가 다른 곳에 눈을 두었다가 되돌아왔기 때문에 찰나 동안 나를 바라보던 실리케, 그녀와 눈이 마주칠 수 있었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면 그녀는 훔쳐보는 행동을 들켰다 해서 모른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다시금 부채를 집어 들고 얼굴을 가리거나 조금 전에 귀걸이를 떨어뜨린 영애에게 그리했듯 외면하리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그녀는 웃었다.
 
 값비싼 레이스를 몇 겹씩 두른 소매에 감싸였으나 반지는 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손으로, 눈동자와 똑같은 색의 술이 담긴 잔을 쥐고 건배하듯 들어 보이며. 그녀가 웃었다. 지금껏 어떤 사람의 얼굴에서도 그토록 깨끗한 웃음을 본 일이 없었다. 손에 들린 유리잔에서 얼음이 녹으며 덜그럭 내려앉았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안 되는 일이었다.




   

─ 꽃들의 주인 fin